영화2009. 6. 23. 01:41
 '걸어도 걸어도'는 내가 처음으로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이다. 몇 해 전에 '아무도 모른다'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
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런가보다 하면서 그 영화는 결국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고요한 충격에 휩싸였다. (흐어어어~!!!난 오늘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팬이다>_<) 솔직히 이제까지는 일본영화에서 잔잔함 외에는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쁘게 말하면 밍밍하달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스토리나 배경 자체는 매우 간단하다. 카메라는 아이를 구하려다가 15년 전에 죽은 주인공의 큰형의  기일에 온가족이 모인 하루를 담담히 따라가기만 한다. 아이들의 왁자지껄함과 옛 앨범을 뒤적이면서 추억을 곱씹는 그들의 모습에서 정겨움을 느끼고, 어떤 때는 그 여름날의 나른한 기운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여서 깜빡 잠이 들 것 같은 몽롱함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나른함에 취해서 방심을 하는 순간 영화는 인물의 대사 혹은 행동을 통해 강렬한 펀치(?)를 날린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서 이렇게 풍부한 의미와 감정을 끌어낼 수 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기상천외한 줄거리나 현란한 카메라기법 없이도 그러한 것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주인공 료타는 그림 복원 작업을 하지만 현재는 무직이다. 그는 남편과 사별한 유카리와 결혼하고 그녀의 아들 이츠시와 셋이서 큰형 준페이의 기일에 집을 방문한다. 그는 늘 공부를 잘하고 의사였던 큰형에게 주눅들어 있다. 이것은 큰형이 죽고 나서도 여전하다. 부모님의 집에서의 하루는 소소하게 지나가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함으로 인한 서먹함과 오래도록 묵혀든 못마땅함과 서운함으로 갈등이 미묘하게 일어난다. 큰형에 대한 콤플렉스에 늘 시달리던 료타는 자신이 어렸을 적에 했던 말을 형이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해 다시금 서운함을 느낀다. 집안에 날아든 나비를 보고 준페이라면서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채울 수 없는 형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는 이츠시는 절대로 의사 시키지 않겠다고 의사였던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 따라 의사가 되겠노라고 쓴 일기장을 발견한다. 

 유카리는 집안에 잘 스며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인지 자기 보고 들으라는 이야기인지 시아버지는 "아이가 있을수록 여자는 재혼하기 힘들지"라고 말하고, 시어머니는 자신이 귀엽다며 기모노를 내주면서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면서 유카리의 속을 뒤집는다. 또 다른 손주들과는 달리 이츠시에게만 '군'을 붙여 부르는 시어머니가 못내 서운하다. 

 준페이가 살려준 아이가 집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 료타는 그 아이가 너무 시원찮게 살아가는게 창피할테니 이제 그만 오라고 하자고 어머니에게 말한다. 그러자 손자들 간식 해먹이면서 즐거워하고, 은근 코믹함까지 묻어나던 어머니는 "내 자식이 죽게 했으니까, 일년에 한 번쯤 괴로움을 줘도 되."라며 그간 숨겨왔던 자식에 대한 강한 애착과 잃은 슬픔을 드러낸다.(이 장면을 볼 때 섬짓했다는;) 아버지와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내는 것 같던 어머니도 사실은 아버지에 대해 서운했던 비밀이 있다. 이렇게 이들은 감추어 두었던 마음들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아픈 부분을 알기에 더 심한 상처를 받게 되는 미묘한 가족관계.

 이 영화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후회'다. 즉 타이밍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들 차 타고 쇼핑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어머니에게 료타는 언제든 사서 태워주겠다며 호기롭게 말하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한다. 이츠시와 셋이서 축구경기 보러 가자던 아버지에게 그러자고 료타는 답하지만 결국 그것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입안에서 맴돌 뿐이다. 이러한 '엇갈림'은 료타와 어머니가 어떤 스모선수의 이름을 계속 생각해내지 못하다가 료타가 떠나는 버스에 타고서야 생각해 내고는 하는 말에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언제나 조금씩 엇갈린단 말야" 이것은 인생 전반에도 해당하는 말이라고 히로카즈 감독이 생각했던 게 아닐까. 나중에, 라는 것은 없다고. 그 순간이 지나버리면 영영 되돌이킬 수 없다고. 가족관계는 그렇게 미묘하게, 후회의 감정을 남기면서도 시원스럽게 해결되지 못한 채 흘러간다. 이동진이 말한 것처럼 '걸어도 걸어도'란 제목도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우리네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잔잔한 가운데서도 강렬하고 깊은 울림을 준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다. 리뷰를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 영화의 섬세한 연출과 분위기, 느낌들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정말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영화, 그렇지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덧) 이동진의 '걸어도 걸어도' 리뷰- 이동진닷컴에 가보니 이 분도 히로카즈 감독의 열렬한 팬인 것 같다. 
     걸어도 걸어도 공식 홈페이지- 여기 들어가면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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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9. 5. 4. 20:56

소매치기
 소매치기인 카말이 훔친 지갑에서 아내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대사도 별로 없고, 영화가 역순으로 전개되는 부분들도 있다. 그리고 설명을 해주지 않아서 끊임없이 생각해야한다. '누가 죽은 거지?' '저걸 왜 주는 거지?' '저 피는 어디서 난 거지?' 영화에서 맘에 들었던 것은 카말의 심리상태를 영상적으로 처리한 부분과 상반되는 요소들을 병치시키는 부분들. 아내의 사진을 본 날 저녁,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의 모습은 흐릿하게 잡히다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슬로모션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카말의 의심과 분노를 잘 표현한 것 같다. 기찻길 바로 옆에 살아서 자칫하면 죽을 수 있는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카말의 가족 그리고 영화속의 장례식과 카말의 아내의 뱃속에 든 생명은 삶과 죽음이 묘하게 공존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 소매치기라는 현실적, 금전적인 차원에서 아내의 사진을 보는 순간 드러나는 사랑과 애정의 문제 또한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면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았다. 결말은 주현이 말대로 뭔가 오이디푸스스럽지만 전반적으로 곱씹을 만한 영화다. 

바다쪽으로, 한 뼘 더  
 기면증을 가진 여고생 원우, 그리고 그녀를 키우는 싱글맘 연희.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잠들어버리는 병 때문에 웃지도 뛰지도 못하는 원우는 원하는대로 할 수 없어서 점점 지쳐가고, 상처받고, 연희는 딸 걱정에 웃음을 잃은지 오래다. 같은 반 친구 준서와 사진가 선재가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면서 모녀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식상해지기 쉬운 성장 영화지만 기면증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있어서 참신함을 느꼈다. 또 너무 억지로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아서 좋았다. 엄마 친구의 딸에게 잠자는 숲속의 공주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삼키는 원우의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남는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서 그래서 더 답답하고 힘든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은 오직 자기만이 지고 가는 고통이기에 외롭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도 그가 말하는 실제적인 고통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자각에 이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가 지구를 던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받는 건 저마다 각자의 공일 것이다."라는 김연수 단편소설의 한 대목이 여기서 떠올랐다. 그렇게 평범하게 웃지도 뛰지도 못해서 나만이 삶을 온전히 충만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렇지만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원우는 성장한다. 낡은 이를 새 이가 대체하듯이. 맑고, 잔잔한 여운이 남는 영화다.

 동베이, 동베이
 
하얼빈에 사는 19세 소녀 쉬에는 술집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날 술집에서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아이를 낳길 원하지만 남자와 술집 주인 아주머니의 권유로 낙태를 한다. 쉬에가 베이징으로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스토리가 단순하지만 영화 속의 어두운 색감과 담담하게 쉬에를 따라가는 카메라를 통해 쉬에의 어둡고 불투명한 삶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쉬에가 탄 기차 뒤로 길게 늘어지는 기찻길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저우 펑 감독은 원래 이 장면에 음악을 삽입했지만 쉬에의 감정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음악을 뺐다고 한다.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길게 늘어지는 기찻길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차의 덜컹거림에서 쉬에의 막막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부작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하니, 쉬에의 베이징에서의 생활을 찍은 영화를 기대해봐야겠다.

딥엔드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누군지 잘 모르겠지만;ㅋ) 회고전으로 나온 작품이다. 15세 소년 마이크가 공중목욕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거기서 일하는 여성동료 수잔에 대한 성적 호기심과 탐닉을 겪으면서 이해불가한 정신상태와 집착을 보여주다가 결국 파국에 이르는 줄거리다. 수영장 속에서 수잔과 나체로 수영하는 것을 상상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솔직히 마이크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만큼 미련하고, 수잔에게 집착한다. 자기는 수잔과 사랑에 빠져있다는 혼자만의 착각 속에 살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데까지 치달음으로써 청소년의 혼란스럽고 와일드(?)한 내면 상태를 보여주려고 감독이 의도한 것이었을까. 감독의 독특한 장면 구성 방식도 흥미로웠다.
이 영화의 교훈은 극단으로 가면 망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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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9. 4. 25. 13:43
 시험이 끝나서 오랜만에 슈팅 라이크 베컴과 마법에 걸린 사랑이라는 영화 두 편을 보았다. 둘다 유쾌한 성장/사랑 이야기라 보고 나니 기분이 '이야~빤짝빤짝~꺅!>_<' (+사랑하고 싶다ㅠㅠ) 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는 가족의 기대와 사회적 편견에 맞서 당돌하게 꿈을 찾아가는 제시, 그리고 정말 어쩔 방법이 없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수동적인 여성에서 점점 능동적으로 자신의 길과 사랑을 찾아가는 마법에 걸린 사랑 속의 지젤이 닮은 것 같다. 전통적으로 수동적인 여성상을 반영해왔다는 비판을 받는 디즈니가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패러디하면서 변화를 꾀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랜만에 훈남들을 보면서 또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아니 영화 내용보다는 이게 메인인지도ㅋㅋㅋㅋ)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츄리닝 하나 입었을 뿐인데도 타고난 색기를 주체할 수 없나보다;;


조나단은 뭔가 하악하악 느낌이라면 반면에 패트릭 뎀시는 '으아~~ 눈빛 속에 녹아버릴 것만 같아ㅜㅜ'같은 느낌이랄까.

 마법에 걸린 사랑을 보면서 Jon Mclaughlin이라는 목소리 좋은 가수도 발견했다. 무도회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so close이라는 노래와 엔딩 크레딧 때 나오는 Carrie Underwood의 ever ever after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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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9. 3. 29. 23:05
 슬럼가에서 자라온 인도 젊은이가 평생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퀴즈쇼에 출연한다. 곡절 많은 삶의 지점들이 퀴즈문제와 맞아떨어지고, 결국 돈 그리고 사랑 모두를 쟁취하게 된다. 엄청난 고통을 겪은 후에 드디어 그로부터 벗어나고, 그토록 찾던 라티카와 마주한 쟈말을 보면서 사필귀정식의 흐뭇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 속에서 전 인도국민이 쟈말을 응원하고 영웅시 하는 것은 빈민가 출신 사나이가 이토록 승승장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즉, 꾸준한 노력이라는 수단만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어떤 사회적 격차를 퀴즈쇼라는 극적인 수단으로 넘어서려는(쟈말은 이에 관심이 없었지만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도전과 성공은 씁쓸한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지만 사람을 흥분케 한다. 거기다 애초부터 돈따위에는 관심없었던 쟈말의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 스토리 전체가 역설적으로 퀴즈쇼의 정답을 제시하니 더욱 흐뭇해진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떠올리며 지친 삶 속에서 어떤 희망과 위안을 얻는다. 어느 평론이 말한 것처럼 'feel good movie of the year'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상당히 well made 영화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feel good'과 well made을 넘어서는 통찰을 지녔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인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잘 모르겠다. 대니 보일 감독이 인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느니 안했느니 등 논란이 많이 일어난다.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인도의 이야기로 볼 것인가 한 청년의 인생 이야기로 볼 것인가. (사실 이 두가지는 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전자에 역점을 두는 관객은 인도에 대한 영화의 표현이 아쉬울 수 있을 것이고, 후자에 역점을 둔다면 그 정도가 덜할 수 있다. 나는 인도에 가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인도를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인도의 어두운 현실이 완화되어서 혹은 과장되어서 표현되었을 가능성 모두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인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진짜' 인도가 어떠하든 간에 어쨌든 인도를 더 넓은 관객층에게 보여주고자 했다는 노력 자체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서 인도를 접하면서 스스로 인도를 더 자세히, 정확히 알고자하는 동기를 부여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영화가 인도 전체를 너무 빈민가처럼 묘사해 놓았다고 말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의 험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경찰들이 아이들을 쫓으며 보이는 골목골목과 사람들, 쟈말과 라티카가 만나는 분주한 빅토리아 역 등을 보면서 인도만의 역동적이고 독특한 분위기, 색깔, 그리고 가능성을 나는 엿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을 더욱 보여주는 것은 감독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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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9. 3. 17. 23:27
 (스포일러 있습니다. >_<) 숨막히도록 아름답고 광활한 몬태나의 자연을 배경으로 러드로우 가족의 이야기가 가족과 함께 했던 인디언 원스탭(one-stab)의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사회통념과 원칙에 충실한 첫째 알프레드, 자유분방하고 반항적 기질이 있는 둘째 트리스탄, 그리고 겁 많고 순진한 막내 새뮤얼의 운명은 새뮤얼의 약혼녀 수잔나가 등장하면서 엇갈리기 시작한다. 알프레드와 트리스탄 모두 그녀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감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에 세 형제는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다. 트리스탄은 새뮤얼을 열심히 보호하지만 영웅주의에 빠져 적군의 진영으로 나아간 새뮤얼은 결국 적군의 총을 맞고 죽는다. 알프레드는 전쟁에서 돌아와 수잔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바다로 향했던 트리스탄이 돌아온다. 트리스탄과 수잔나는 사랑에 빠지고, 비통한 알프레드는 도시로 떠난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다시금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듣고 기약없이 여행을 떠난다. 수잔나는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몇년 후에 "우리가 함께한 모든 것은 사라졌소. 다른 사람과 결혼하오."라는 트리스탄의 편지가 날아온다. 수잔나는 절망에 빠지고, 트리스탄과 알프레드의 아버지 러드로우 대령이 중풍에 걸리면서 러드로우 일가는 점점 황폐해져만 가는데...
 
 줄거리를 반 정도만 썼는데도 이렇게 길구나; (그 다음이 궁금하다면 dvd 대여 고고)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러드로우 가족에 대한 것이지만 초점은 둘째 트리스탄에게 있다. 트리스탄은 어린 시절 곰을 찾아 나섰다가 곰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지만 동시에 곰의 손가락을 자르게 된다. 원스텝이 인디언 이야기에 따르면 동물과 피를 나눈 인간은 그 동물과 하나가 된다고 한다. 이때부터 트리스탄은 곰과 하나가 되어 인간의 세계가 아닌 자연의 세계에 속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내면의 곰의 목소리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수잔나와 불타는 사랑에 빠졌다가도 목소리에 따라 미련없이 떠나기도 한다. 정말 단순하게 본다면, 트리스탄은 천하의 못된 놈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혼할 여자를 두고 갑작스레 떠나고 나서 띡- 이별통보를 하다니!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인간세계의 사회 문화적 규범의 잣대로 그를 바라보기 때문에 내려지는 결론이다. 한 세계의 기준으로 다른 세계에 평가의 잣대를 대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올바른 평가라고 볼 수도 없다. 트리스탄이 사는 세계는 인간세계의 규범에서는 벗어난 세계인 것이다.(이에 대해 남성성, 혹은 마초이즘에 대한 옹호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다른 문제에 해당한다. 나는 자연세계의 기준은 인간세계의 기준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곧 남성성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것은 의미부여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스탄은 자기가 속한 세계와 속하지 않은 세계를 화해시키고 그 조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쟁터에서 한시도 새뮤얼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보호하다가 그가 죽자 인디언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고, 수잔나와 사랑할 때 진심으로 뜨겁게 사랑한다. 수잔나가 알프레드와 결혼한 후에도 트리스탄이 그녀에게 준 보호팔찌를 간직하라고 말한다. 이자벨 2세와 결혼하면서 아들도 낳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나간다.

 그러나 원스탭의 말처럼 그는 돌과 같아서, 그와 가까이 오는 자들은 부서진다. 트리스탄은 비극을 경험하면서 죽을 때까지 두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분명히 듣는 자들이 있다. 그 목소리를 따르는 사람은 미치광이가 되거나 전설이 된다." 이렇게 트리스탄의 삶은 하나의 전설이 되어 전해져 내려온다.

 이 영화에서 때로는 가슴벅차게, 때로는 잔잔하게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모두에 내재되어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닐까. 굳이 자연세계라는 거창한 것을 들지 않더라도, 사회의 통념이나 사회문화적인 규범에 답답함을 느끼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면 '미치광이'로 취급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이 트리스탄에게 투사되는 것이다. 비극적 사건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껴안고 묵묵히 나아가는 트리스탄의 모습에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조금은 더,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에 대해 용기를 가지게 된다.

전설의 삶을 위하여.
 

 
Posted by bein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