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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가 1960년에 나왔으니까 내년이면 꼭 50주년이 된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꾸준히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스케일이 더 컸지만 다소 산만한 느낌이었는데 이 영화는 제한된 인물과 장소만으로도 훨씬 더 긴장감 있는 스토리를 전개한다.
마리안은 남자친구 샘의 빚을 갚고 그와 결혼하기 위해 회사 돈 4만달러를 훔치고 도망친다. 시외의 어느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마리안을 모텔의 주인인 노먼 베이츠는 친절하게 대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노먼은 모텔 뒤의 집에서 아픈 어머니를 모시면서 살고 있는데 고속도로 위치가 바뀐 이후로는 거의 손님이 없다고 말한다. 노먼은 집으로 돌아가고 마리안은 샤워를 하던 도중 칼을 든 어머니에 의해 찔려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노먼은 마리안의 시체와 피를 보고 당황하지만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증거를 인멸한다. 그 이후 마리안이 다니던 회사측에서 고용된 형사 아보개스트는 수사 중에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노먼을 의심하고 노먼 몰래 노먼의 집에 들어가 어머니를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어머니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마리안의 언니 라일라와 샘은 아보개스트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노먼의 집에 찾아간다. 라일라는 노먼의 어머니를 발견하지만 해골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고 샘은 뒤에서 라일라를 찌르려던 노먼을 붙잡는다.
나중에 밝혀지는 바로는 노먼은 어머니와 둘이서만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으나 어머니에게 남자가 생기자 질투와 분노로 인해 어머니와 그 남자를 모두 살해한다. 그런데 존속살해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결국 그는 어머니의 시체를 계속 보존하면서 어머니를 머리속에서 다시 살려낸 채로 살아간다. 즉, 노먼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어머니라는 두 개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정신분열증환자다. 노먼이 마리안에 대해 호감을 가지자 그 속에 있던 어머니 인격이 질투를 느껴서 마리안을 살해한 것이다.
이 영화는 훌륭한 스릴러지만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나에게는 스릴러보다는 악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영화였다. 대중문화가 묘사하는 악함,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악함은 선함과 분명히 대비되면서 마치 악마가 씌인 것과 같은 절대악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런 케이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실세계에서의 악함과 선함은 구분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그리고 악함은 사람의 약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약하다는 것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약함을 숨기기 위해 마음에 견고한 성을 쌓고 한껏 힘을 주고 위협해본다. 그것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모른채. 또는 마음 속의 괴로움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정신의 감옥에서 서서히 미쳐갈 수도 있다. 노먼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싸이코'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공포스럽거나 불쾌한 감정적 반응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싸이코는 싸이코이기 이전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영화에서 노먼이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너무 안됐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조금만 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면 노먼은 친절하고 순수한 그 청년 그대로 살 수도 있었을텐데.
노먼 역을 연기한 안소니 퍼킨스는 "싸이코의 비밀은 그것이 비극이라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에 호러영화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별 이유도 없이 사람을 잔혹하게 마구 죽이는 살인마들이 난무하는 요즘 호러/공포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싸이코는 단연 빛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