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0. 15:55

인간실격(세계문학전집103)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문학선
지은이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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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인간 실격은 요새 읽은 책이 아니라 인턴으로 일할 당시에 읽은 책이다. 그 때는 뭔가 느끼긴 했지만(뭐였더라?-_-) 내가 워낙 문학작품의 의미 파악을 못하는 편인지라 그냥 그렇게 이 책이 책장에 꽂히고 잊혀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재용이의 중학교 독서평설 덕분에 이 소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해설부분을 읽고 나서 그제서야 감동이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랄까.

 어째서 인간이 무시무시한 도깨비 같은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위선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심을 감춘 채 타인들과 관계를 맺지만, 그 반대편으로는 관계의 은밀한 이익에 관해 따져보곤 하잖아요. 요조에게 도깨비와 가장 비슷한 형상으로 비추어졌던 사람은 다름아닌 호리키였습니다. 그는 요조에게 돈을 몇 푼씩 빌려 가는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요조가 자살을 시도한 후 막막한 심정으로 찾아갔을 때에는 아주 교활하고 냉정하게 그를 대했죠. 호리키는 끝끝내 요조를 만나며 손해 한 번 보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요조는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외톨이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어쩌면 요조는 정말로 그들과 같은 '인간'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 세계'에서는 말이죠. (중략)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무엇인가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요조의 눈에 비친 인간들의 '밝고 명랑한 불신' 일까요, 아니면 요조를 파국으로 몰아간 그 '처절한 신뢰' 일까요. 서로를 불신하면서도 신뢰하는 척하는 인간과, 진정한 신뢰를 꿈꾸는 인간. 우리는 그 둘 가운데 어떤 길을 지향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대학교 1, 2 학년 때까지는 사람을 불신하는 경향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사람들의 친절 속에는 어떤 꿍꿍이가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쿨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인간이란 참 신기한 존재라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도 불신의 기운은 상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내가 불신을 하는데 상대방은 나를 신뢰할 리 만무하다. 재용이의 독서평설은 우리가 어떤 길을 지향해야 하는지 묻는다. 온전히 신뢰를 하면 다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불신으로 시작하면 사람 간에 진정한 신뢰를 싹 틔울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다치고 상처 받을 확률이 99 퍼센트라 하더라도 진정한 신뢰를 쌓아갈 1 퍼센트의 확률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온전한 신뢰를 선택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osted by beinme
2009. 4. 4. 23:24
 실험심리 입문 수업을 듣고 있어서 '20세기의 위대한 심리학 실험'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심리학 실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궁금하였고, 이 책이 유명한 심리 실험들을 세세하게 기술할 것으로 기대했다. 변인을 어떤 방식으로 조작하였고, 어떤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었는지, 실험을 어떤 방식으로 고안하게 되었는지 등. 이 책은 이러한 나의 기대와는 빗나갔으나 오히려 예상외의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우선, 저자는 통계와 숫자에 가려져 놓치기 쉬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드러낸다. 맺음말에도 저자가 말했듯이 최초의 심리학자는 철학자였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의 어느날 Wundt가 "Enough of this! You philosophers can sit around and think all you want, but I'm going to measure something, damn it." (이 부분 읽다가 뿜었음ㅋ) 이라고 말하면서 심리학이 탄생하였다. 이 때부터 심리학은 하나의 '과학'으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실험의 고안과 반복, 뇌의 물리적 구조와 화학적 작용 등을 밝혀내기 위한 작업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심리학은 여전히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조작된 조건에 반응하는 기계에 불과한가? 우리는 얼만큼이나 사회적 존재인가? 상황의 힘은 우리에 내재된 도덕성을 압도하는가? 인간을 위해 동물을 실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우리의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인가? 정말 증상이 진단에 선행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저자는 심리학자의 생애에 대한 친밀한 기술과 실험을 함께 소개하면서 이 질문들을 던지고, 한번쯤 곱씹게 해준다.

 저자는 또한 실험을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실험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 그리고 스스로의 작은 보충실험 또는 실험에 참여한 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보다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심리학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특히 밀그램의 실험에 대한 내용이 인상 깊었다. 밀그램이 측정한 것은 권위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전기충격이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실험자의 말을 믿었으므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측정한 것이라는 비판, 실험실에서의 상황이 실제 삶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비판 등을 통해 무얼 들어도 '오-'하며 쉽게 수긍하는 나 자신을 붙잡고 조금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기의 실험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저자는 실제로 밀그램의 실험당시 저항한 피실험자와 복종한 피실험자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 전자가 소위 복종적인 삶을 사는 반면 후자는 저항적 삶을 사는 의외의 결과를 목격하기도 한다. 

 저자의 글은 따뜻하지만 실험의 결과 자체만을 두고 보면서 인간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이 가슴 속에 퍼져나가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도덕성보다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 여럿이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인간, 명칭과 개념에 매몰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일이 있으면 자신의 신념을 조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현실을 왜곡하는 인간.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바로 그것 때문에 심리학이 존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마음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아는데서부터 변화를 향한 발걸음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밀그램의 실험에서 복종한 피실험자가 그 이후 자기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서 저항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또는 방관자효과에 대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주자 방관하는 자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진 것처럼, 심리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덮으면서 차가워졌던 마음은 다시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서서히 채워진다. 
 
Posted by beinme